Edith Piaff - L'Hymne à l'amour
에디프 피아프(Edith Piaf)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의 노래는 전파에서, 영화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무대에서 울려 퍼진다. 전 세계의 가수들 너도나도 그의 노래를 불렀다. 일례로 최근 아이슬란드의 여가수 브린힐더 구전스더티(Brynhildur Gudjonsdottir)는 <에디트 피아프>라는 제목의 헌정 앨범을 발표했다. 그보다 수십 년 전에 미국 재즈의 전설인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은 에디트 피아프의 명곡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불렀으며 얼핏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디스코스타 도나 서머(Donna Summer)나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도 그의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열풍은 결코 처음이 아니다. 사후 10년, 20년, 25년, 30년, 35년, 40년이든 의미를 갖다댈 수 있는 때만 되면 프랑스는 어김없이 에디트 피아프 추모열기에 휩싸였다. 수록곡이 별 다를 바 없는데도 앨범은 끊임없이 출시된다. 지금까지 나온 베스트 앨범만도 수십 종이다. 사정이 이러니 프랑스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파트리샤 카스(Patricia Kaas)처럼 행여 프랑스 출신의 유명 여가수가 나오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제2의 에디프 피아프'라는 수식을 붙인다. 에디트 피아프라는 이름이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라 프랑스 입장에서는 민족주의적 상징 언어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목소리'인 셈이다. 생전에 에디트 피아프는 영어노래를 취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모국어인 불어로 노래를 불렀다. 프랑스 사람들의 에디트 피아프에 대한 무한 경배는 무차별로 공격해오는 미국 대중문화에 밀리지 않으려는 프랑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 대중음악과 동일시된 '샹송'을 전 지구적 음악언어로 전파한 인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지구촌 각국의 사람들이 샹송 한두 곡을 기본적으로 챙긴 것과 같은 '샹송의 글로벌화'를 견인한 사람이 에디트 피아프인 것이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새천년을 앞두고 마련한 특집 '20세기 100년의 스타들'에서 '에디트 피아프가 프랑스에게 영원한 목소리를 주었다(She gave France an enduring voice)'고 칭송했다. 그가 이처럼 지난 세기의 위대한 음악유산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주 평범한 사실에 기초한다. 바로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로 사력(死力)을 다해서 또 혼을 토해내며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파괴력이 탑재된 그 파워풀 가창이 왜소한 체구의 여성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나면 더욱 경이롭다. 피아프는 참새라는 뜻의 파리 속어로, 그를 스타로 키워준 카바레 주인 루이 레플레가 그의 작은 체구를 두고 붙여준 별명이다. (카바레는 지금 성인오락장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작은 뮤직홀이었다) '몸 피아프' 즉 작은 참새(영어로 little sparrow)는 막강한 소리와 대비되기에 더욱 의미가 배가된다. 1915년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때인 1939년에 전국적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피아프의 인생은 비참했다. 그가 태어난 직후 서커스곡예를 하던 아버지는 군대에 소집되었고 홀로 딸을 양육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아기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버렸다. 외할머니는 술꾼들 틈에서 손녀를 키웠고 제대해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아이를 노르망디에서 사창가를 운영하고 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시작이었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미디어를 정복하고 프랭크 시내트라와 빙 크로스비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번 월드스타가 됐지만 막상 그의 생은 불행했다. 동료가수 이브 몽탕, 헤비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자크 필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과 결혼실패로 고통을 당했으며 내내 술과 마약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지러지고 얼룩진 인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이 가운데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의 애달픈 로맨스는 잊혀지지 않을 전설로 남아있다. 1983년 클로드 르로슈 감독은 이것을 영화화했으며 둘 간의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한 무수한 책이 발간되었다. 2005년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라는 책은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초콜릿보다 더 많이 팔릴 만큼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동시대에 활약한 샹송의 대부 샤를르 아즈나부르(Chareles Aznavour)의 회고. “피아프는 복서 마르셀 세르당을 열렬히 사랑했지요. 세르당은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 있었고 피아프는 베르샤이유에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당은 피아프와 같이 있기 위해 일찍 떠났고 비행기는 아조레스 해협 위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피아프는 이틀 아니면 사흘 자기 방에 꼭 박혀 있더니 삭발하고 나타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불렀지요. 방에서 가사를 완성하여 죽은 세르당을 위해 노래한 것입니다.” '사랑의 찬가'는 피아프를, 아니 샹송을 대표하는 불후의 걸작이다. 또 다른 고전 '장밋빛 인생'도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이 빚어낸 곡이다. 에디프 피아프의 곡은 실제 연애사가 만들어낸 곡이 부지기수다. 1959년 그를 유럽의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곡 '주인님(Milrod)'은 운명처럼 자주 덮친 교통사고로 인해 쓰러졌을 때 옆에서 지켜주며 짧은 사랑을 나눈 조르쥬 무스타키의 곡을 녹음한 것이다. 1961년 겨울, 피아프는 그리스 태생의 미용사 테오파니스 람부카스를 소개받는데, 그를 그리스어로 '사랑해'라는 뜻인 '사라포'로 불렀다. 피아프와 테오 사라포는 이듬해 결혼했고 듀엣으로 '사랑이란 그런 거지(A quoi ca sert l'amour)'라는 곡을 취입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세월에도 불구하고 무한감동을 제공하는 것은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을 진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과 예술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에디트 피아프의 키워드일 것이다. 결코 인기나 영예를 노리고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죽기 전 무대에서 노래 부르다 쓰러져 스탭이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고 했으나 피아노 레그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노래를 끝까지 마친 일화는 유명하다. 영화 '파니 핑크'를 통해 재조명된 1960년 생애 후반기의 절창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노래를 듣고 있으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가공할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곡을 프랑스의 '마이 웨이(My way)'로 추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에디트 피아프하면 남자와의 스캔들, 잦은 파경, 교통사고 그리고 알코올과 마약중독을 먼저 떠올린다. 5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인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영화 <장밋빛 인생>이 말해주듯 그의 생애가 영화로 드라마로, 또 책으로 자주 다뤄지는 이유다. 음악 외적인 것들도 피아프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상승시킨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기적 열창의 절대 파워가 빚어내는 미학을 간과할 수는 없다. 혹자는 그의 노래를 '신성한 광기(Divine madness)'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는 노래의 터뜨릴 때를 알았던 것처럼 속삭일 때를 알았고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놓는 만큼 가라앉혀줄 때도 알았다. 폭발과 절제가 그처럼 절묘하게 동거한 노래도 없다. 어떤 전문가는 결코 그가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피아프를 '20세시 최고의 여가수'로 숭앙하는 데는 노래에 실린 진실성과 불굴의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세계의 여가수를 집대성한 저서 '시 밥'의 작가 루시 오브리엔은 그를 '잔 다르크와 동등한 팝 히로인'으로 일컬었다. 1963년 48살의 길지 않은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가 역사에 남긴 자취는 거대하다. 우선 나중 여가수의 텃밭이 된 '팝 발라드'의 영역을 크게 넓힌 존재로 평가된다. '여가수는 노래를 이렇게 해야 감동을 부른다'는 패턴을 시범하고 확립한 것이다. 그가 출현한 이후로 사람들은 비로소 샹송을 세계의 주류 대중음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56년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22곡으로 리사이틀을 가졌고 7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미국에 대대적인 피아프 열풍을 일으킨다. 브로드웨이에서도 '미국 판 피아프' 스타일이 생겨났다. '무지개 저편에(Over the rainbow)'로 유명한 주디 갈란드(Judy Garland)도 그것을 따랐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bra Streisand) 역시 그의 영향을 흡수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에디트 피아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가수는 목숨을 걸고 노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수들이 노래로 승부하지 않고 요란한 의상과 차림이나 섹시한 자태 등 순전 외적인 측면과 마케팅 풍조에 의존하는 지금의 음악계에 그는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아쉬움과 불만 그리고 '혼으로,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를 보고 싶다'는 소박하나 영원한 소망이 한층 에디프 피아프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고 때마다 그를 불러내는 것이다. 인기와 명성에만 중독이 되어 기본을 팽개치는 가수들은 무대에 대한 천착이 있을 리 없다. 심지어 지금 가수는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후대 사람들은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무대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는 음악의 기본 미학을 에디트 피아프를 통해 깨친다. 그는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살아있다. 1963년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4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이래 그곳에는 43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도 에디 피아프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되새기는 것은 한 여인의 드라마인생에 담긴 '프랑스의 얼'이다. ***에디프 피아프가 남긴 명곡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1947년 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 1950년 Padam...Padam(빠담 빠담) 1951년 Johnny tu n'es pas un ange(자니, 넌 천사가 아니야) 1953년 La goualante du pauvre Jean(가엾은 장의 노래) 1954년 L'accordeoniste(아코디언 연주자) 1955년 Mon manege a moi(나의 회전목마) 1958년 Milord(주인님) 1959년 Non je ne regrette rien(난 후회하지 않아요) 1960년 A quoi ca sert l'amour(사랑이란 그런 거지) 1961년
|
출처 : 표주박의 오늘이 마지막이듯
글쓴이 : 표주박 원글보기
메모 :
'마음이 즐거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양공연-고향의 봄 귀여운 꼬마 이중창 (0) | 2011.10.27 |
---|---|
평양공연-고향의 봄 (0) | 2011.10.27 |
[스크랩] 김범수 노래모음 (0) | 2011.08.02 |
[스크랩] 무정부르스 - 김조한 (0) | 2011.07.21 |
[스크랩] 임재범 / 사랑, 사랑보다 깊은 상처 (0) | 2011.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