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되기

[스크랩]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대하여

불고옹 2017. 4. 2. 13:16

어제 토요일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학자 기념일이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미사해설단 월례모임도 있어서 10시 미사에 다녀 왔는데 저의 대부님 세례명도

토마스 아퀴나스이시어서 미사중에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는데 신부님께서 모처럼 성인에 대하여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셔서 저도 관심을 갖고 메모를 하였는데 평소 못들은 흥미있는 얘기여서 오늘

기록으로 남겨 놓고 나중에 시간이 나면 좀 더 연구하여 보도록 할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하여는 아래에 있는 글을 참고하시면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성인께서는 42살의 나이로 선종하셨는데, 선종하기 전까지 저술한 책의 양이 성당을 가득 채우고

도 남을 정도로 저술하셨고 특히 예수님의 사후 천년간 계속된 신학을 집대성한 신학대전을 집필

하신 것은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사후 교회는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바오로 사도의 계통과 로마교회의

전통적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베드로 사도의 계통으로 두 갈래의 성격을 지니고 살아 왔는데

성인님이 계시던 때는 바오로 사도의 정신을 잇는 보나벤투라 성인과는 다른 베드로 사도의 정신을 계승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이론을 바탕으로 신학을 집대성 하였는데 토마스 성인이후로 현재까지 토마스 성인의

신학을 중심으로 교회가 과거 이데아철학의 요소와는 다른 성격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b

(플라톤은 BC 348에 그리스에서 탄생, 아리스토텔레스는 BC  384년에 그리스에서 탄생)

 

토마스 성인은 천년의 신학을 변화시켜 현재에 이르도록 하였는데 신학대전은 하느님께 관련된 질문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본인의 생각을 덧붙였다고 하는데 하느님은 현실의 근거속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토마스 성인의 신을 증명하는 5가지 방법은

첫째, 진리와 질료의 원리를 통하여 증명(모든 존재의 근원은 신)

둘째, 모든 것에는 운동하는 힘이 있음(운동의 시작에 신이 존재함)

셋째, 세상은 법칙에 의해 움직임(규칙의 주재자는 신)

넷째, 마음속에 진선미에 대한 그리움(마음을 심어준 진선미의 근원은 신)

다섯째, 인간은 양심이 있다(양심은 신이 심어준 것)

 

사람은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부류는 그 당시 예수님의 성체를 믿지 않고 밀떡은 하나

의 상징으로 여기는 파가 있었고 이것은 나중에 개신교의 탄생하게 되는 교리가 되기도 하였는데

밀떡이 신부님의 기도를 통하여 성체로 변화하는 실체 변화의 사례로 미사 중에 성체에 대한 의심을 품은 신부가 성체를 모시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곳에서 피가 번져나오는 현상을 보고는 놀라서 도망을 갔다가 교황님께 고백성사를 하게되고 교황님이 토마스 성인을 시켜 성체를 수거

해서 보고토록 하면서 성체축일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인께서 지으신 성체찬미가는 성체를 현시하는 성시간에 꼭 바치는 기도이므로 아래 성체찬미가

를 보면 성인의 마음을 읽으실 줄 있으리라 생각되어 함께 인용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의 노력이 천년의 교리를 이어오는 전통을 갖게 되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토마스

성인의 행적은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업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긴 얘기를 하셨지만 내용이 심오하여 요약하기가 쉽지 않아 이 정도로 마무리 하여야 겠습니다.

저는 사람으로 테어난 것만으로 나는 하느님의 창조론을 믿으며, 보이는 현상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믿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의 은총을 믿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는 형제를 만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인사를 했더니 복이 무엇

이냐고 물어셨는데, 저는 살아있는 것이 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대부님과 토마스 아퀴나스 본명을 가진 교우분들께는 축일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몬테 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이 반대하였지만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 파리에서 유학하였으며,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256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성인은 철학과 신학에 관하여 위대한 저서들을 남겼고, 탁월한 학식으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성인은 1274년 4월 7일 시토회의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선종하였고, 1323년 시성되었다. 성인의 유해가 1369년 1월 28일 툴루즈로 옮겨졌는데,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매일미사 1월호 162쪽에서)

<이데아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데아론을 주장한 플라톤의 모습.

이데아론은 플라톤이 처음 주장한 형이상학 이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이데아는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의 인간에 대한 원인으로, 인간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현상 세계에 인간이 실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현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낡고 사라지는 것에 반해, 이데아는 시간에도 그 모습을 변치 않으며 현상 세계의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이데아라는 점이다.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으며, 원래 인간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이 현실세계로 오면서 레테의 강을 건너게 되어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여 이데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오해하기를, 이데아를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해서 이데아가 인간 내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생각으로 이데아는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이데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이데아론이 플라톤의 분유와 모순되는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플라톤은 모든 사물들이 원래 이데아의 일부를 가진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책상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현상 세계의 책상에 나타나고,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사물에 나타나는 것을 들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현상 세계의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일부를 가지며, 이데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사물은 이데아에 존재하는 사물과는 유사점이 있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화가가 그린 사물에 대한 그림은 실제 사물보다 이데아와 더욱 멀어진다. 플라톤은 이러한 예술을 비판하였는데, 현상 세계의 사물보다 이데아에서 더 멀어진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데아론은 흔히 동굴 속에 있는 그림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절대 뒤돌아 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인간들이 있는 동굴에 사물들의 빛이 동굴 벽면에 비치면 인간들은 그 그림자를 사물 자체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가짜 허상에 불과하다. 이 비유는 이데아론에 있어 널리 알려진 것이나, 이것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질료-형상 이론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또 다른 비판으로는 '때나 이와 같은 더럽고 추악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이데아가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톤은 때와 이 등의 이데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악함과 쇠약함과 같은 이데아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함과 건강함이 부족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는 이데아론은 유명론으로도 비판받는다. 유명론이란, 보편적인 개념은 말뿐이라는 것으로, 실제로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유명론이 참이라면, 세상에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데아론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형상에 대하여>

어떤 대상의 겉모양·현상·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대상을 이루는 재료인 질료(matter)에 대립되는 개념.

형이상학에서는 사물의 잠재적 원리인 질료와 구별되는 능동적·결정적 원리를 가리킨다. '형상'이란 말은 철학사와 미학사를 통틀어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이 썼던 '에이도스'(eidos)라는 말도 형상을 가리키는 것인데, 에이도스란 유한하고 변화하는 개별자들에 대립하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영원한 실재를 의미했다. 플라톤의 형상개념은 피타고라스의 이론에서 나온 것인데, 피타고라스는 물질적 요소가 아닌 예지적 구조(피타고라스 자신은 이 구조를 수라고 불렀음)가 대상들에게 다른 것과 구분되는 특성을 준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이 이론을 발전시켜서 물질적·감각적 사물들이 오직 받아들이고 모방할 수 있을 뿐인 '영원한 형상' 개념에까지 이르렀다. 플라톤은 영원한 형상이 비록 감각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물질적 대상보다는 더 높은 실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질료와 형상을 구분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플라톤의 추상적 형상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감각 사물은 질료와 형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며, 질료와 형상은 서로 결합되지 않은 채 하나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 요소로서, 사물 자체라기보다는 사물로 발전될 재료이다(→ 색인 : 잠재성). 이 원초적인 질료로부터 개별 사물이 생기는 현상은 바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특정형상을 획득하여 다른 것과 구분되는 사건인 것이다. 질료는 잠재적 요소이고 형상은 현실화시키는 요소이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순수형상인 제1의 동인, 즉 부동의 동인이 있음을 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렇게 한 사물의 질료는 그 사물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사물이 생겨나면 우리는 이 요소들이 그 사물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형상은 그 요소들의 배열이나 조직상태로서 그렇게 배열되고 조직된 결과 요소들은 바로 그 사물이 된다. 그러므로 벽돌과 회반죽은 어떤 한 형상이 주어질 때는 집의 질료가 되고, 다른 형상이 주어지면 벽의 질료가 된다.

질료는 잠재적으로는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무엇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 형상이다. 여기서 '질료'는 상대적인 용어이다. 왜냐하면 벽돌더미 위의 벽돌 하나는 잠재적으로는 집의 부분인 반면 현실적으로는 이미 하나의 벽돌이다. 즉 그자체가 형상과 질료의 복합물이다. 벽돌이 집이나 벽에 대해 질료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흙은 다시 벽돌에 대해 질료가 된다. 질료는 잠재적으로 어떤 특정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올바른 형상이 주어졌을 때만 현실적으로 바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은 그의 목적론적인 견해와 결합되어 있다. 그의 목적론이 제시하는 결론에 따르면, 형상의 발전은 방향이 있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물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상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벽돌은 진흙보다 더 상위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집은 벽돌보다 더 상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에 적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은 중세 스콜라주의 전통의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것들이다. 아퀴나스는 형상 개념을 더 넓게 파악하여 사물 본질의 규정을 받지 않는 성질인 '유연적 형상'과 감각지각에 의해서 질료와 구분할 수 있는 형상 요소인 '감각적 형상' 등 다른 구별들을 포함시킨다. 둔스 스코투스나 오컴 같은 다른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에 근거해서 연구했지만, 아무도 아퀴나스만큼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서는 형상이 마음의 속성이 되어 주관의 형식이 된다. 그는 이 형식은 경험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형식은 개별 주체에 의해 물질 대상에 부과된다고 주장했다.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두 형식으로 규정하고는, 비록 우리가 공간과 시간 자체는 경험할 수 없지만 공간과 시간 중에서가 아니면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나아가 칸트는 인간 지성에서 구조적 요소로 작용하는 12개의 근본 범주를 확정했다. 형식 개념은 철학 이외의 몇몇 분야에서도 창작활동과 비평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예를 들어 문학에서 형식이란 용어는 작가가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비유, 구조, 장르 등을 가리킨다. 소설·콩트·격언·하이쿠[俳句]·소네트(Sonnet)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형식은 또한 작품의 내적 구조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대부분 한 작품이 비평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작가가 작품의 외적 형식의 틀 속에서 내용과 내적 구조를 얼마나 잘 통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시각예술의 비평에서는 형식이란 용어가 색이나 질감 같은 요소에 의해 얻는 것과는 달리 도안술이나 배치를 통해 얻는 결과를 가리킨다. 조각과 그외 조형예술에서는 형식(또는 모양)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주요한 조직화 요소가 되는 것을 말한다.

 

-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출처 : GREEN HOME (초원의 집)
글쓴이 : 아브라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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